스무 살 절친/이문자 수필가
스무 살 절친
산모롱이로 돌아앉은 자락에 유월이 짙다. 우리의 절친(切親)을 앞세우고 찾아든 한나절의 카페. 마주 앉은 꽃다운 젊음이 오늘따라 눈이 부시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칭송들. 여느 때면 실눈으로 기분 좋게 웃어야 할 이 녀석. 웬 일인가. 눈을 깔고는 자못 심각하다. 7월부터는 새로 일을 시작하게 돼 그림을 그만 둬야 한단다. 그래서 고민이라는 것. 스무 살 절친에게 갈등이 생겼다니 예기치 못한 일이다. 분위기를 띄워볼 양으로 노래 한곡을 정중히 청하고 우린 긴장한다. 뜻밖에도 노래 대신 흘러나오는 ‘별 헤는 밤’. 시적 감성을 담은 차분한 암송이 놀랍도록 섬세하다.
엉뚱 발랄한 절친이 어느새 이만큼 성숙해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니. 더구나 우리의 뜰을 벗어날 찰나에 있다니 그야말로 진지한 순간이 아닌가. 어제는 대화방을 누비며 신명나더니 졸음 온다는 응석에 단비소리를 자장가 삼아 푹 자라고 했었다. 이 거침없는 청춘에게 고민이라거나 주저함이란 없었는데… 순수 영혼을 흔드는 조짐이 참말일까 싶어 그림 방 실버들이 덩달아 긴장되는 순간이다.
모두가 내 일이듯 했다. 원로시인은 열아홉 하이틴에게 안정감과 서정성을 불어넣어야 한다며 파스텔화 방에 전격 입문시켰다. ‘7번방의 선물’이 아닌 ‘시인방의 선물’로 절친 K양이 온 셈. 천진스런 열아홉 젊음이 우리 곁으로 오게 된 연유가 극적이고도 아름답다. 그쪽 방의 주인들이 강력범 수형자들이었다면 여긴 시인감성을 지닌 실버들이라는 점이 다를 뿐. 맑은 영혼으로나 순진무구함으로 따지자면 두 주인공이 다를 바가 없는 천사들이다.
꽃띠 아가씨의 출현에 시인들의 그림 방이 웃음바다가 되어 수시로 출렁거렸었다. 주인공이 던지는 돌팔매가 파문을 그리며 시인들을 동화나라로 데려가곤 한 것이다. 가족 말고 말동무가 간절했던 절친. 우린 끔찍이도 이 젊음을 아꼈고 소통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내게 글 쓰는 게 뭐가 어렵다고 결석까지 했냐고 안타까워도 했다. 실버합창단에 들어가 꼭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천진한 감성에게 요건이니 자격이니 설명할 계제가 아니었다. 특단의 해결책(?)을 내놓으며 노래 부르고 싶어 하는 이 주인공에게 허용과 수긍이 최선책임도 알았다. 관심사 안에 있는 누구든 반드시 함께여야 한다는 자아욕구가 나름의 논리였음인지도 모른다.
생애의 완숙기를 넘어선 실버들에게 순수 열아홉 에너지의 파동은 자잘한 물비늘이었지 결코 파란은 아니었다고 본다. 과잉 애정이 혹여 분별력을 흐리게 하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풋풋한 애교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심연에 깔아둔 기억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법. 노년의 시인들은 저마다 유년을 떠올리며 같은 눈높이에서 호흡하고 함께 유쾌해 했다. 참견이나 고집이 밉지 않았고 까르르 웃음보 터지는 날이 더 많아 목요일이 은근히 기다려졌다고 한다면 과장이라고 할지.
미처 다듬어지지 못했던 모서리가 둥글려지고 배려, 숙고하는 모습이 눈에 띠면서 우린 ‘절친’이란 말을 아끼지 않았다. 디데이마다 완성되는 시인들의 시화가 탄성을 자아낼 만큼 수작(秀作)이었던 건 그림 방을 채우는 밝음과 온기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우리의 스무 살 절친이 화폭에 담는 대상이며 색감도 나날이 수준작으로 올라서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절친’을 어떤 가치로 규정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절친 사이가 된 자초지종의 일화를 들을 경우가 많다. 유유상종의 각별한 우정이거나, 개성은 달라도 돈독한 신뢰를 지닌 친구, 아니면 죽고 못 살 만큼의 가까운 사이를 일컬을 진데 왜곡된 우정이 아닌 이상 필연이든 우연이든 같이 있고 싶은 친구를 이르는 말이 아니겠는가.
우린 오매불망 목요일을 기다리는 주인공을 위해 열일을 제쳐놓고 그림 방으로 달려갔고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앞장세우고 함께 찾았었다. 나이의 경계를 허물고 심야에도 통화로 응대했고 그러기에 ‘스무 살 절친’, ‘행복한 마스코트’라는 호칭을 주저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림으로 만난 지 두어 해가 되어간다. 싱싱한 꽃잎에 닿아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듯, 상큼한 청량제이듯 실버들에게 연둣빛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 스무 살 절친. 나른한 노년을 일깨워 산들바람 같은 시구를 떠올리며 동심까지 그려낼 수 있었으니 행복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이제 조신한 숙녀로 진입하려는 갓 스물의 청춘을 저 가고 싶어 하는 길로, 제 또래들에게로 보내야 할 때인가 보다.
‘심심해’, ‘빨리 데리러 와야지’, ‘내일 하이킹 가자’ 며 무시로 대시해오던 우리의 절친. 빨리 피어나는 꽃이라고 더 아름다우란 법은 없을 게다. 때를 기다려 더 향기롭게 피는 꽃이 있듯이 스무 살 절친이야 말로 세상을 느리게, 신중히 사는 젊음이 아니겠는가. 부디 새로운 울타리로 들어가 건강한 웃음으로 성숙하기를 소망해 본다. 짙푸른 계절, 유월의 부름이라면 ‘스무 살의 절친’을 이즈음에서 양보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 이제 이 스무 살 절친을, 아니 예쁜 파랑새를 숲으로 날려 보내야겠다. 이 순수 젊음이 그리울 때마다 예의 숲을 바라다보며 상큼한 젊음을, 청량제인 듯한 스무 살 절친을 화폭에 담아야겠다.
『창작수필』 2016.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