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적 삶과 수필의 맥혈기(脈穴氣)
수필적 삶과 수필의 맥혈기(脈穴氣)
박양근(부경대교수, 문학평론가)
들어가면서
수필은 가까이하기에 먼 당신인가. 아니면 멀어도 당신인가. 그게 아니면 함부로 다루어도 될 정부인가. 수필쓰기는 그만큼 즐거우면서도 고되고, 힘들면서도 보람 있는 작업이다. 당연히 창작의 산고와 희열이 뒤따른다.
문학, 특히 수필을 배우기 전에는 수필을 예사로 생각하여 용을 부리지 않고 하다못해 막 힘도 쓰지 않는다. 내키는 대로 쓰는 것을 술술 풀린다고 여기며 그럴싸한 문구가 떠오르면 감정이 영글었다 하여 단숨에 몇 장이고 써내려간다. 언어를 정선하고 치밀한 구조로 엮으려는 노력보다는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답다는 세간의 속설을 추종한다. 나아가 자신의 글에 도취되어 “참 좋다”는 주변의 덕담을 그런가하고 믿게 된다.
그것에 회의감이 일어나서 수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수필이 무엇이며 어떻게 쓰는가를 진지하게 배우다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머나먼 당신”이 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수준 높은 작품 앞에 서면서 “왜 나는 작아지는가”라는 상대적 위축감에 빠질뿐더러 자신의 글쓰기가 개헤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수필의 팩트인 “P․E․N”이론과 수필의 4원소인 주제, 소재, 구성,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문자도”라는 시스템을 이해하면 지성과 감성이 어울린 미적 유기체로서 글 판이 짜인다. 비로소 수필이 “곁의 남자(여자)”가 되기 시작한다.
논자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담론은 수필적 삶은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여 맥(脈)과 혈(穴)과 기(氣)라는 다분히 동양적인 수필론으로 나아가려 한다. 이런 접근법을 택한 이유는 수필은 체험의 상상화라는 기본적인 수필론을 지키면서 지금까지 서양의 문학이론에 의지해온 수필론의 정체성을 복원하고 피상적인 논리보다 창작에 실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소위 수필창작론으로서 수필미학이다.
동서양의 신화는 사람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우주 창조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체는 유기적인 조직으로 이루어져있다. 서양의학은 인체를 기능에 따라 구분한다면 동의학은 상호반응의 상태를 보여주는 맥혈기를 중요시한다. 조물주가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글을 만들 때, 땅과 사람과 글은 공통적으로 맥혈기를 가지게 된다. 인체의 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체를 곧게 세우는 축이라면 혈은 신체의 운기가 상호 교차하는 지점이며 기는 몸에 흐르는 기운에 해당한다. 골격이 곧지 않으면 문맥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고 혈이 제 자리에 위치하지 않으면 감동과 인식과 충격을 줄 수 없으며 기가 흐르는 않은 수필은 즐거움과 유머를 잃게 된다. 손가락에 조그만 가시가 찔려도 온몸이 날카로운 고통과 아픔으로 반응하는 인체공학을 상상해보라. 인체의 연결회로는 얼마나 경이적인가.
수필을 대할 때마다 수필적 삶을 실천하고 “글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면 살아 있는 글, 내공이 충만한 글, 사람냄새가 배인 글을 이루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가꾸고 싶은 나 자신이고 얻고 싶은 평생의 연인으로서 수필이 아닌가.
본론1: 수필적 삶과 사유
인간은 창조의 동물이다. 우리말 속담에 “아이는 제 먹을 복을 타고난다.”는 말이 있다. 아기가 울고 웃는 동작은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이자 원시적 창작 행위에 해당한다. 고대 원시인들이 동굴벽화를 그리고 바위에 상형문자로 새긴 것도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잠재적인 창작 욕구를 표현한 것일 뿐이다. 천부적인 문사(文士)나 일류문인은 못될지라도 누구에게나 창작 욕구와 잠재력이 부여되어있다. 하지만 모두가 작가나 수필가가 되지 못한다. 수필적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는 저녁을 생각해 보자. 공교롭게도 우산도 없이 들판 길을 걷다가 비를 맞이하면 마음 언저리가 뭉클해진다. 어떤 사람은 한기를 느끼면서 집에 있는 가족을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적적한 들판의 쓸쓸함에 혹하여 마냥 걷고 싶을 것이며, 어떤 사람은 촉촉하게 젖은 들판을 바라보며 생명의 기운을 느끼며 비를 맞는 들짐승과 나무에 연민을 품기도 한다. 모두가 비를 바라보지만 각기 다른 물상을 떠올린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의 차이이면서, 현재 처한 상황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쨌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남다른 행동양식과 반응을 보여준다. 이것이 수필적 삶이다.
1) 수필적 삶은 불편하게 사는 것이다.
가령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그렇다면 승용차를 몰기보다는 기차를 타고, 급행열차보다는 완행열차를 탄다. 황톳길이 나타나면 걸어가고 한적한 바닷길이 나서면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가로 들어선다. 그것이 수필적 삶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길이다. 차를 몰고 하루 종일 달린들 교통안전용 표지판과 도로 외에는 본 것이 없다. 수필창작의 실마리는 마음이 쉴 때 이루어진다. 인간사회와 떨어지면 쓸쓸할지 모르나 자연과 결별한 시간은 허무하다는 자각을 하면 자연으로의 여행은 지혜와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2) 수필적 삶은 창조적이다.
돈을 멀리하고 인색하게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가능하면 자신의 노동으로 삶을 꾸려가라는 말이다. 백화점의 진열대에 얹힌 가공식품은 시간을 절약하고 풍부한 영양소를 보증하지만 삶을 풍성하게 하지 못하며 장바구니를 채울수록 마음의 바구니는 가벼워진다.
예를 들면 딸기를 구입하기 보다는 산딸기를 직접 따서 술을 만들면 찔레꽃 봄날이 연상되고, 다리미질은 사라진 민속품에 대한 애정을 회복시켜준다. 도자기를 굽거나 꽃을 키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성들은 남성에 비하여 수필적 삶을 일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성들이 먹고 마셔 없애버리는 속성을 지닌다면 여성은 만들고 키우는 창조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것이 여성에게 수필이 더 어울리는 이유에 해당한다.
3) 수필적 삶은 고독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를 위한 혼자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정신적으로 혼자 살아가는 예술가는 더더욱 고독하다. 하지만 고독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열심히 생각하고 부지런히 사색하는 상태에 해당한다. 생각하기 위해서, 사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혼자일 수밖에 없고 홀로 삶의 숲을 들어가서 나오게 된다. 여행을 하려면 일행이 적거나, 홀로 떠나고, 가능하면 호젓한 밤길을 걸어 볼 것이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으면 쉴 사이 없이 나눈 이야기밖에 남는 것이 없음으로 가벼운 배낭을 메고 단 하루라도 산으로 들어간 사람이 수필을 쓴다.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필적 삶을 얻기 위해서 고독을 대면하는 것이다.
4) 수필적 삶은 낮은 곳을 지향한다.
수필적 삶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 아니라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라는 방향성을 지향한다. 야생초를 제대로 보려면 허리를 굽혀 시선을 낮춰야 하고 서서 고개를 치켜들 때보다 바위나 잔디밭에 누워 바라본 하늘이 더 없이 숭엄하고 웅대하다. 들고양이 조차 해로운 적이 아니라 방황하는 초인으로 보면 좋다. 이렇듯이 귀한 것, 높은 것, 번쩍이는 것보다 작고 보잘 것 없고 버려지고 구박받는 대상을 마음속으로 끌어 당겨야 한다. 수필가는 이러한 손길과 눈길이 필요하다. 눈높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눈 낮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본론2: 수필의 맥
수필적 삶이 일상의 맥이라면 수필문의 맥은 서두와 전개와 결미로 이어진다. 사람의 머리와 몸통과 하체에 비교된다. 서두는 주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사람의 두뇌에 해당하며 배경 설정, 분위기 조성 및 주제를 암시한다. 몸통에 안치된 오장육부는 음식을 소화하고 숨을 내쉬고 배설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마찬가지로 글의 전개부는 작가의 사상과 감정과 체험을 용해하고 엮고 풀어내는 연출의 장에 해당한다. 주제와 소재가 결합하고 경험에 대한 설명과 느낌이 교차하면서 작가의 지적, 정적, 의지적 세계가 구현된다. 오장육부가 건강하여야 몸이 건실하듯이 수필의 충실도는 전개부의 미적 구조에 좌우된다. 수필의 전개부는 대체적으로 3개의 내용군으로 이루어지는데 각각의 내용군은 2-4개의 형식단락을 거느린다. 꼿꼿한 다리가 몸을 제대로 받쳐주듯이 탄탄한 결미는 내용을 요약, 재정리하고 비전제시와 가치평가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글에 균형미와 통일감을 부여한다. 엉뚱한 길로 빠진 글은 맥이 끊어졌기 때문이며 글을 많이 쓰지만 눈에 뜨이는 발전이 적음은 맥을 제대로 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3원칙은 아리스토텔레스가『시학』에서 말한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는 기본 맥에 해당한다.
①서두 단락 (1)
②서두와 전개부의 연결단락(1)
③전개부
ⓐ제1 내용군(3)
ⓑ제2 내용군(3)
ⓒ제3 내용군(3)
④전개와 결미의 연결단락(1)
⑤결미단락(1)
1) 단락 간의 연결성
수필문의 기본 단위인 단락은 척추 마디와 같다. 수필의 본문을 기능별로 구분하면 내용을 전달하는 내용단락과 단락을 서로 이어주는 기능단락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서두에서 본문으로 넘어갈 때와, 본문에서 결미로 넘어갈 때의 기능단락이 연골처럼 제 구실을 하여야 물처럼 흐르는 문맥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단락 간의 연결성이라고 부른다.
2) 주제와 문맥의 관련성
글의 구조는 주제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서두에서 암시된 주제는 전개부에서 확장되고 마지막 단락에서 종합화되어 결미에서 재강조 된다. 전개부는 여러 개의 소주제문으로 나누어지는데 소주제가 지나치게 많거나, 전개되는 내용이 주제와 어긋나면 글은 산만해진다. 수필은 짧은 시간 안에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난해하거나 전문적인 내용은 맥을 끊게 된다.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초조감으로 주제와 상관없는 에피소드나, 상식화된 정보, 백과사전에서 차용한 지식 등을 삽입하면 비만증에 걸린 몸처럼 글의 균형이 깨뜨려지면서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아가 뒷받침 문장이 주제와 맥이 통하는가를 살펴 서술의 잉여에서 벗어나야 한다.
3) 제재와 문맥의 상관성
수필은 짧은 문학이 아니라 응축과 압축의 문학이다. 작가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어휘, 구문, 수사, 문장을 엮어 내면서 소재의 범위를 가능한 좁혀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필은 제재를 나열하는 산문이 아니라 특정소재를 선택하여 다층적, 다면적으로 분석하여 그것의 외적 특성, 내적 본질, 역사적 의의, 다른 사물과의 상관관계, 작가 자신의 체험과의 상관성을 제시하는 산문이다. 그래서 수필의 소재는 수평적으로 펼쳐지면서 수직적으로 심화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느 사람의 전 생애를 시대적으로 열거한 것은 비만형과 같고, 한 가지 제재만을 다룬 것은 슬림형 신체와 같다. 수필문의 맥은 주제의 의미화를 따르는 것이므로 중심 제재를 기준으로 여러 소재가 동심원이라는 꼴을 이루게는 것이 바람직하다.
4) 형식과 전개의 다양성
글의 전개부는 작가의 내공을 보여주는 무대이다. 주제를 구체화하는 전개부에서는 서술, 설명, 묘사, 예시, 사유, 논증, 분석, 질문, 비교 등의 다양한 기법이 동원된다. 그리고 내용에 맞게 문장의 장단을 조절하고, 소통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강건체, 우유체, 만연체 등을 다양하게 구사한다. 만일 서정수필이라면 분위기 조성-일화-묘사-분위기 조성-일화-묘사의 연쇄구조를 지니고, 설리수필이면 명제제시-예시-논증 -요약이고 생활수필이면 일화제시- 설명- 일화제시-설명-사유-주제 순으로 짜여 진다. 구도는 하부장르에 따라 달라지지만 중심축에서 벗어나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글을 쓰는 일은 조각가의 작업처럼 철심을 박아 맥을 세운 다음에 빚고 깎는 퇴고의 작업이 따른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좋은 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틀을 살필 수 있는 안목이 탄탄한 맥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수필의 맥을 세우는 기본적인 노력이 이어 감동과 공감의 혈을 잡고, 나아가 문학성을 제고하는 기를 키워야한다. 맥을 세우면 적어도 일층 집을 지을 수 있는 목수처럼 “수필가”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
본론3: 수필의 혈로서 결속 이론
반듯한 글이 되려면 글 맥이 필요하듯이 감동, 공감, 충격,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혈이 있어야 제대로 산 수필이 된다. 인체의 혈이 뼈와 뼈, 근육과 근육, 뼈와 근육, 장기와 혈관, 혈관과 림프를 잇는다면 수필의 혈도 작가의 체험과 사유, 인생관과 자연관, 시공의식, 독자의식과 작가의식을 이어준다. 감수성으로서 이 혈은 글을 읽다가 무릎을 탁 치는 부분, 왠지 가슴이 두근거려지는 부분, 머리가 띵해지는 부분에 해당한다. 그런 접점이 없는 글은 난삽한 수사법으로 화장만 한 경우가 태반이다. 멋스럽게 읽혀지지만 감동과 공감이 없는 글은 혈이 없음이요, 글을 부지런히 쓰는데도 한편의 좋은 글도 건지지 못함은 혈을 의식하지 않은 결과이다.
1) 형상과 인식의 결속
인식은 형상에 대한 반응이다. 인식은 형상으로 존재하는 무엇을 읽는 능력으로서 비가시적 관념을 가시화하거나 사물을 새롭게 보도록 한다. 형상만 중요시한 수필은 복사 기능에 그친 것이므로 대상의 근원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집요한 질문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무엇?”에 해당한다. 인식은 오감이 포착할 수 없는 미지(未知)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서 사랑의 근원, 미움의 근원, 죽음의 근원, 탄생의 근원 등을 묻는다. 그러므로 형상을 아무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형상이 지닌 원형적 조형미를 찾기 위해 부단하게 “무엇인가? 아냐, 그것이 아니고 다른 무엇인가?”라고 자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사찰 대웅전의 지붕에 우뚝 솟은 망새기와를 상목수로 여기거나, 연못의 백련 봉오리를 우주의 소리를 증폭시키는 마이크로 간주하거나, 바닥에 떨어진 흰 밥풀을 수도승으로 바라보는 것은 망새와 목수, 연꽃 봉오리와 마이크, 식탁에 오롯하게 놓인 밥풀과 벌판에 선 수도자의 원형적 일치를 인식한 결과이다.
이처럼 형상과 인식이 결속하면 무지와 무관심에 묻힌 진실이 드러나므로 의미화한 고급수필을 쓸 수 있다. 문학의 결속이 과학의 인과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현상과 상상의 결속
수필문은 외적 현상과 내적 상상을 합쳐야 한다. “그래서”라는 결속이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이다. 이를테면 현상은 창작 동기가 사랑의 갈증인가, 미움의 분출인가, 호기심의 발로인가 등이며, 상상은 그 갈등을 해소하는 미적 노력에 해당한다. 밖에서 본 것(outer-watching)을 내적으로 자각(inner-recognizing)하여 “그래서”에 대한 해답을 찾아 현상과 상상 간의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과정이기도하다.
예를 들면 봄비가 내리면서 달팽이가 사랑을 하고, 겨울눈이 내리면서 아버지가 덮어주던 담요 한 장의 따스함이 생각나는 것이 현상과 상상의 결속에 해당한다. 최민자는 <나비의 꿈>이라는 수필에서 나비가 나는 풍경을 “자유혼, 정착을 거부하는 보헤미안, 바쁠 것 없는 한량, 우울을 모르는 신사”로 상상하는데 나비를 본 시각적 현상이 “알아감”이라는 상상으로 승화되어 다시 나비를 꽃과 공생하는 곤충으로 보지 않고 풍류와 사랑의 행위자로 느끼기 때문에 자유의 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현상과 상상의 결속하는 차이가 심미적 층위를 만든다. 나비를 보되, 양봉업자. 의 눈으로 보는가. 미혼 처녀의 눈으로 보는가. 음악가의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글의 좌표가 달라지는 이유는 현상과 상상이 결속하는 양상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3) 내용과 표현의 결속
수필은 내용과 표현이라는 날줄과 씨줄로 짜이는데 표현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내용에 맞아야 한다. 어휘, 수식, 문장은 별개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라는 무늬를 그려내는 의미망의 부분집합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람의 몸에 흐르는 기가 서로 만나는 이치와 같은 것으로 좋은 수필의 조건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수식어와 피수식어 사이에 이루어진 결속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녹야의 노루와 설원의 노루와 농장의 노루는 환경이 다르므로 그 운명도 달라진다. 눈 쌓인 벌판에서 먹이를 찾아 해매는 어미 노루가 생존을 위협받는 가정의 모성을 그려낸다면 밤새워 마을로 찾아온 수노루는 집을 떠난 남자의 귀환을 상징한다. 글의 내용은 눈 속의 노루 한 마리에 대한 묘사이지만 헤매는가, 찾아오는가 라는 표현에 따라 수필화자가 처한 절망과 고독의 주제화가 달라진다.
표현은 “왜”라는 질문으로 나아가게 된다. 왜 하필 설원의 암노루인가. 왜 강바람을 맞고 선 솔인가. 왜 겨울철 옥수수인가. 그 공통된 이유는 겨울은 죽음과 절망과 견인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모든 원소는 유기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으므로 일단 내용을 선택하면 그것에 적합한 표현이 뒤따를 수밖에 없고 이로써 내용과 표현이 동일한 의미망에 걸리게 된다.
4) 주제와 제재의 결속
주제를 내면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절한 소재를 찾아내는 전략이 필요하다. 수필쓰기에서 제재와 주제의 만남을 비유하면 짝짓기와 같다. 창작은 목적성 언술 이므로 좋은 수필이 되려면 좋은 제재와 좋은 주제가 만나야한다. 소위 일제일재(一題一材)의 원리로서 주제와 소재 간의 거리는 최대한 좁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재와 작가 간의 영적 동화(同化)가 필요한데 수필가는 주제에서는 지적 일치성을, 소재에서는 정적 일치성을 이룰 필요가 있다.
오창익의 대표작 <북창>을 살펴보면 제재인 북창은 북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는 물상이며, 목성균의 <명태>는 아버지의 꼿꼿한 선비다운 품성을 반영하며, 윤재천의 <구름카페>는 작가의 문학적 꿈과 서구적 문학관을 상징하는 구조물에 해당한다.
주제와 제재의 결속을 위한 질문은 “그렇다면”에 해당한다. 특정 주제에 몰두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우주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속에서 특정 대상과 유기적인 만남을 이루게 된다. 예를 들면 “새처럼 울고 싶다”라는 내적 주문은 그렇다면 “그 새를 겨울눈발에 두자”라는 제재로 연결된다. 이것은 어떤 제재도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수필적 의미를 상실한다는 뜻이다.
5) 서사와 서정의 결속
수필에서 서사와 서정의 결속은 필수적이다. 서사는 설명으로 서정은 묘사로써 나타나는데 서사적 기법인 해설, 설명, 논증 등이 정보전달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서정적 기법인 직유, 은유, 이미지, 반어, 역설 등은 심미적 효과를 높여준다. 단락 내에서도 설명과 묘사가 균형을 이루어야 서사와 서정의 질적 안배가 이루어진다. 묘사가 뒤따르지 못한 글은 설명이나 보고문에 그치며 반대로 비유가 남용되면 감상적인 미문이 되어버린다.
가령 구활의 <아버지의 초상화 그리고 어머니>를 예로 들면 어머니는 “장터에 볼일 보러 나간 아버지가 참외가게에서 참외를 깎아 먹으면서 어머니가 지나가시는데 아는 체”를 하지 않고, “화가 난 어머니는 간 갈치 대신 참외 한 아름을 사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아작아작 씹어 먹는 데모”를 벌렸다는 내용은 설명과 묘사, 서사와 서정이 결속한 좋은 예에 속한다. 서사와 서정의 배합에서 보면, 장터에서 아내를 못 본 척 하는 남편과 앙갚음하는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봉건주의라는 서사가 노란참외라는 서정에 집중된 것이다. 좋은 수필은 서정미를 바탕으로 산문정신을 구축하여야 한다는 예이기도 하다.
수필에서 혈은 글을 죽이거나 살리는 부분이다. 사지가 멀쩡하다고 산 사람이 아니듯이 감동과 공감, 기막힌 인식과 순수의 정조가 없는 글은 독자에게 “손해 봤다”는 반응을 준다. 문장 전체에 혈을 깔려고 하지 말고 그저 한번만이라고 웃게 하고, 무릎을 치게 하고, 잠시 시선을 멈추게 하면 “본전 찾은”글이 된다. 그 정도가 되면 수필의 무협계에서 “급(級)에서 단(段)”으로 넘어가서 수필 도반에 속할 수 있다.
본론4: 수필의 기(氣) 흘리기
사람은 골격과 오장육부가 갖추어지더라도 기가 없으면 식물인간에 불과하다. 기는 산 수필을 만드는 심미적 에너지다. 기를 흘려보낸다는 말은 감수성과 심미감을 생산하고 유통시키고 소비하는 과정을 말한다. 사람에 약골과 장골과 식물인간이 있다면 문장에도 죽은 글과 산 글이 있다. 그 구체적인 방식은 상상, 환상, 연상, 착상, 발상 등이다. 때문에 시인이 언어의 연금술사이고 소설가가 허구의 변호사라면 수필가는 문장의 검객이자 내공의 달인이어야 한다.
1) 수필과 상상
수필적 상상은 “새롭게 읽기”라는 창조적 행위로서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풀이하는 과정을 말한다. 불문학자인 김병규가 “일상생활 속에서 여태껏 발견되지 못한 것을 발견하여 썼을 때 그것은 하나의 창조에 해당한다.”라고 말했을 때 창조는 단순한 언어적 발화가 아니라 무엇을 다른 무엇으로 바꾸는 행위를 지칭한다. 이처럼 수필의 상상은 창조적 상상으로서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전사(轉寫)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강돈묵은 <옥수숫대>라는 수필에서 바싹 마른 겨울 옥수숫대를 “바람 앞에 울고 있다”(청각). “한 잎은 아랫도리를 감았고, 또 한 잎은 위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시각) “꺼칠하면서도 풀 먹인 베처럼 온몸을 두르고 있다.”(촉각)로 분해하여 가족에게 모든 기운을 쏟아버렸다가 이제 상복을 입은 늙은 아버지“라는 존재를 창조해낸다. 강돈묵의 옥수수는 옥수수조차 인간의 일생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상상력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기능으로서 과학과 문화와 예술을 이루어낸 동력에 해당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오감으로 대상을 만나지만 우주에는 오감이 포착하기 힘든 미지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상상이 필요하다
2) 수필과 환상
환상은 로맨스가 갖는 팽창과 과장의 미학을 지향한다. 수필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때로는 환상적인 꿈을 펼쳐내는데, 이때 환상은 신비적이며 이국적인 정취와 탐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갖는다. 흔히 수필적 환상의 예로서 찰스 램의 <꿈속의 아이들>을 예로 드는데 찰스 램은 아이가 없음에도 환상적 꿈을 빌어 아이와 함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이렇듯이 작가에게 잠재된 욕망과 무의식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환상은 상상과 차이를 보여준다,
한의원 침구실에서 여승과 나란히 침을 맞은 때를 그려낸 안병태의 <여승>속의 수필화자는 성애적 환상으로 빠져드는데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다루어 성(性)과 성(聖)을 결속시켜 낸다. “빨쪽하게 열린 커튼 사이로 드러난 뽀얀 맨발”을 바라보는 화자는 “발가락에다 불현듯 주홍빛 꽃물을 들여 주고 싶은 누이를 떠올려준다. 이처럼 환상의 영토에서 여승의 “뽀얀 작은 맨발”은 종교적 나르시시즘과 세속적 에로티시즘과 유년기의 노스탤지어라는 서로 다른 코드를 결합한다. 수필의 환상이 소설의 허구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수필과 연상
연상은 사물이 지닌 의미를 확장하면서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정신작용이다. 연상은 일반화에 의한 연상, 추상화에 의한 연상, 유사성에 의한 연상, 인접성에 의한 연상으로 구분되는데 일반화는 단풍으로 가을을 떠올리는 것이며, 추상화는 다이아몬드 모양에서 야구장을 떠올리는 것이며, 유사는 달로서 운전대를 생각하고, 인접은 고향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꽃을 뿌리면 장례식을 연상시키고 꽃을 바치면 구애를 연상시켜주듯 연상은 두 사물 간의 상호관계를 차별화한다.
연상의 예로서 김용옥의「수련」을 들기로 한다. 이 작품에서 수련은 “하얀 꽃 한 송이”라는 사물에서 “물 위에 내려앉은 선녀”로, 다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발전하고 “두 손을 곱게 합장한 소녀의 손”으로 나아간다. 물 밖으로 나온 흰 꽃봉오리는 희색의 신성함에서, 그리고 연꽃이라는 종교적 기능에서, 봉곳한 형상에서 기도하는 손을 연상시킨다. 이 모든 대상은 종래 “일생일대의 찬연한 개화”라는 영성과 우주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마이크가 된다. 「수련」은 꽃에 대한 일반적 연상과 신앙에 대한 추상적 기도와 봉오리라는 인접성이 결합된 예라고 하겠다.
4) 수필과 착상
착상은 “아! 그것 글감이 되겠네”라는 작가와 소재간의 만남이다. 잠복된 현현을 일깨우는 착상의 여운이 오래갈수록 좋은 작품을 낳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처럼 글의 밑바닥에는 착상이라는 순간적인 번뜩임이 존재한다.
수필가는 새로운 안목으로 참신한 글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이때 글감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말한다. 컴퓨터자판기를 천자문으로 바라보고 설원의 전봇대를 격리된 등대로 생각하고, 나무의 떨켜에서 로그아웃을 생각하는 것은 모두 신선한 착상에 해당한다. 정진권 수필가는 <귀를 후비며>라는 수필에서 귀를 후비다가 부러진 성냥개비를 창밖으로 내던지려다가, “가려운 데까지 닿지 않는다고.....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게 된 성냥개비”를 타박한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평소 인간의 이기심에 대하여 글을 써야겠다는 동기가 부러진 성냥개비에 붙으면서 <귀를 후비며>라는 한편의 글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착상이 “나는 행동 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반응에 해당한다.
5) 수필과 발상
발상은 인습적인 영상(These)을 버리고 새로운 상(Antitheses)과 새로운 기호(signal)를 만들어내는 작업으로서 형식적 파괴를 지향한다. 문학 소통에는 하드코드(hard code)와 소프트코드(soft code)가 있는데 전자는 형식의 변이에, 후자는 내용의 진화에 적용된다. 근래 퓨전수필이 두드러지는 배경도 IT시대의 감성적 영상미에 기인한다. 예를 들면 대사로 펼쳐내는 극적 수필, 그림과 글이 만나는 수화(隨畵)산문, 칼럼과 에세이가 합치는 변종산문, 동물을 수필화자를 삼는 의인화수필 죽은 자와 산자의 대화수필은 모두 발상의 결과라 하겠다.
본인의 졸작 <화왕산 억새>는 “핀다. 자란다. 흔들린다. 탄다. 죽는다. 다시 핀다”라는 문장을 24절후, 12계절의 숫자에 맞추어 반복시켜 개체적 죽음과 종족적 번식이라는 주제를 시적 운율을 접목한 실험수필의 일종이다. 개체는 사라지지만 종(種)은 무한하다는 발상을 억새밭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하겠다.
작가에게 상상, 환상, 연상, 착상, 발상은 맥과 혈을 잇는 신경망과 같다. 작품의 미학적 지평을 확장하는 기(氣)는 작품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두께뿐만 아니라, 작가의 인식력마저 결정한다. 그렇게 하려면 다양한 안목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사물의 미세한 특징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현미경 같은 눈과, 소재가 지니는 근원적 의미를 찾아내는 망원경과 같은 눈, 소재의 색깔, 냄새, 모양, 어원, 용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프리즘과 같은 눈, 소재가 지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살피는 잠망경과 같은 눈, 선악, 미추의 이분법을 조화시키는 쌍안경과 같은 눈,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심안이 필요하다. 작가와 사물을 일체화하는 육안(六眼)을 지니면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券氣)를 이루는 수필인이 될 것이다.
닫으며
뒤퐁은 “문(文)은 인(人)이다”라고 하였고 하이데거는 “문장은 존재를 드러내는 집”, 김진섭은 “자기를 말하는 것은 문장”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말은 수필의 맥혈기(脈穴氣)의 상관성을 지적한 명언들이다.
수필의 맥혈기는 수필의 감동과 인식의 진폭을 결정하는 3요소로서 이것들이 배양되는 장소가 수필적 삶이다. 수필적 삶은 생존을 초월한 문학적 삶에 필요불가결한 정적이며 지적인 진로이다. 영국의 철학자인 베이컨은 역사는 기억을, 철학은 이성을, 문학은 상상(想像)을 바탕으로 한다고 하였듯이 작품은 인간성과 자연성과 우주성을 동시에 지향하려는 삶에 좌우된다. 작품에 질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문장의 한계가 아니라 수필적 삶이 착근된 정도에 좌우된다. 그 삶이 상상력을 수확한다. 그래서 수필가는 상상이라는 농기구로 글밭을 가는 농부에 비유된다.
진정한 수필가는 맥혈기라는 문학적 에너지를 생산하고 비축하고 활활 태우는 장인(匠人)이다. 그 불에서 태어난 수필이 불멸의 연인으로서 산 수필이 된다. 달리 말하면 수필가는 사색하는 “?”형이 깨우침의 희열인 “!”로의 변신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시인더러, 소설가더러 문장가와 문필가라고 하는가?
아니다. 수필가만이 그 명예의 훈장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