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은시인의 시와 시평
서시가 주목하는 시인(계간 ‘서시’ 09 여름)
무덤은 시간을 넘는다
손진은
저물면 누구나 그곳에 닿아야 한다지만
무덤이 여우처럼
머리 위를 쑥쑥 넘어가는 때가 있다
나주 반남면 복암고분군 앞
살구꽃잎 하르르
살구나무를 벗고 떨어질 때
일천오백년이 꽃잎 한 장의 두께로
내 가슴에 수로를 내며 헤엄쳐 들어오고
바람은 자꾸 잔디를 핥고 있는 햇살 알갱이
서둘러 떼어놓는다
콩꼬투리 같은 쌍무덤
다시 구워내고 있는 햇살공방 안에선
커다란 독을 포갠 침대에서
필시 오랜 잠에서 깨어나
별자리에서 당도하는 이야기쯤에나 귀 기울이고 있을 사낸
은제관식이며 금동신발 생게망게 뒤척이던 밤을
이젠 벗고 싶어할 것이다
그도 저 꽃잎의 오래된 수로를 거슬러
컹컹 개가 짖는
만개의 시절 입구에 다다르고 싶은 것
몇 남지 않은 늦가을 햇살에
잘 익은 콩깍지들 느닷없이 낡은 집 부수고 뛰쳐나오듯이
오래된 기억처럼
무덤은 오늘도 슬프게 시간을 넘는다
때론 여우처럼 때론 도깨비처럼
*생게망게 [부사] 하는 행동이나 말이 갑작스럽고 터무니없는 모양.
지금도 어느 물기 머금은 눈이 나를 보고 계신다
손진은
그런 걸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개구리가 천이백년을 산다는 것
다시 천이백년이 지나도 자라지도 늙지도 않는다는 것
통도사 자장암엔 그 개구리
금와보살을 친견하려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인다
걸어논 금와 사진 앞에서조차 연신 고개 조아리는 불자들
그런 개구리가 어딨냐는 핀잔에
어허 그래도 이 양반이,
앞장서서 바위틈에서 천천히 나오는
엄지손가락만한 금빛 개구리에게 경건하게 삼배하고
어허허, 그래도 아니냐며 씰룩이는 눈동자 기침의 대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 삭지 않은 요나처럼
내장 속에서 산 채로 나와 헤엄친 혜공의 물고기처럼
세월도 그의 살 한 점 뜯어내지 못하는
네 다릴 치켜들고
바위 틈에서 또록또록한 눈을 뜨는
진리
란 죽어서도
새끼를 쳐서도 살이 붙어서도 빠져서도 안 돼
무언으로 말하는
어느 물기 머금은 눈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바위틈쯤서
지금도 나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말씀!
목련
손진은
구름을 낳는 나무가 있지
일 년에 한 번쯤은
태반인 양 묻어놓은 땅속 곳간에서
구름을 낳아 허공에 매다는 나무
불끈 솟은 힘줄 송글송글한 땀으로
동그랗게 혹은 잘게 부순 추위와 어둠 햇살을 뭉쳐
튼 살 틈으로 밀어내는 구름의 자식을
혀와 목젖 근처 심지어는 팔다리에까지
입성으로 꿰찬 나무의 기쁨!
햇귀와 흙냄새로 술렁이는
하늘 아래 가장 설레는
어치와 떼까치와 아지랑이의 시간
대궁을 타고 터지는 저 구름 씨앗 소리 좀 보아
펼친 구름의 옆구리 사이에서
새 흉내를 내며 햇살이 소리치며 날아갈 때
저 불구의 나무도
불굴의 나무가 되어
누렇게 익어가는 상아 궁전의 봉오릴 타고
지상을 뜨고 싶단
맑고 뜨거운 생각 부풀리는 것을
그러나 꿈에도 생각 못했다는 듯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애써 낳은 구름 땅바닥에 엎질러버리곤
새끼를 잃은 어미소가 되어
허전을 간식처럼 되새김질하는
저 자글자글한 잔주름
물고기 나무
손진은
키 큰 서어나 느티 아래 발 담그면
그가 낳은
연두 초록 물고기떼가 훅,
뿜어대는 입김
새어드는 햇살 하늘 계류로 몸 씻고
겹치고 포개는 빛그늘 만드는
저 지느러미 옆줄들
챙챙 서늘한 눈알 주둥이 부딪다
게으른 구름과 새똥의 적막 찢어놓자는 심산으로
배 뒤집으며 하늘 수면위로 튀어오르기도 한다
설겅설겅 내 몸도 떠오르는 현기증
제법 초록물이 든 팔다리로 나
서둘러 마을로 내려간 뒤에도 저들
어스름 속살에 깃들어 쌔근쌔근 잘도 잘 것이다
쪽쪽 햇살 젖꼭지 빨고
촘촘 빗줄기 푸르고 노란 달과 별 꼬리를 물고
하늘 그물 찢으며 시간의 내 건너면
마침내 붉은 아가미 될 것이다
사방 햇빛에 불붙은 몸으로
한 토막 어린 것들의 빵으로
우우 몰려다닐 것이다
모천회귀,
세찬 바람과 격류 거슬러
기진한 숨 할딱이는
세상 모든 바닥의 어미가 되어
오늘 내게 지상에서 젤로 힘든 일은
손진은
늦점심을 먹으러 마주 보는 두 집 가운데 왼편 충효소머리국밥집으로 들어가는 일, 길가 의자에 앉아 빠안히 날 쳐다보는 오른편 황남순두부집 아주머니 눈길 넘어가는 일, 몇 해 전 남편을 뇌졸중으로 보내고도 어쩔 수 없이 이 십 년째 장사 이어가고 있는 머리 희끗한 아주머니, 내 살갗에 옷자락에 달라붙어 있을 아린 눈길 애써 모른 체 하는 일, 서럽게도 싱그러운 오월의 허공에 얹혀 아직도 생각에 잠긴 내 다리 슬로비디오인 양 왼쪽으로 틀어버리는 일, 두 직장 중 하날 고르는 일보다 한참은 더 어려운, 착 달라붙는 두 아가씨 중 하날 떼놓는 것보다도 수십 배나 더 망설여지는, 지뢰를 밟은 줄 알아차린 병사가 다리에 붙은 맘 떼놓지 못해 그곳의 공기 마구 구기고 있듯, 눈망울 속으로 들어온 한나절이 때처럼 빠지지 않는 오늘 오후 내가 아리랑 고개보다 더 힘들게 넘어가고 있는 고개는
<시평>
자연, 그 위대한 신생의 시간
고봉준
오래된 시간이 신생의 시간으로 자리를 바꿔 앉는다. 시인의 시계(時計)는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빠르게 이동하는 불가역적 시간의 법칙 대신 오래된 것들에 새로운 숨결을 부여하는 것은 신화적 시간에 따라 작동한다. 그는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마이더스의 손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낡은 것들을 오래되었다는 이유에서 폐기하지 않는다. 오래되고 무가치한 것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일, 이것은 시인의 특권 가운데 하나이다. 하여, 시인의 시선과 손길이 스쳐지나간 곳에서 사물들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받고, 다른 형상을 얻음으로써 새롭게 태어난다. 시인은 무심한 밤의 풍경 속에서 살아 있는 눈을 발견하듯이 익숙하고 오래된 것들에서 신생의 비밀을 찾아낸다. 시의 언어가 이 비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풍경’이 다만 풍경으로 머물기를 그쳐야 한다. 풍경이란 생의 약동이 거세된 정적인 정물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인의 시선이 그 풍경에서 새로운 세계를 읽어낸다.
손진은의 시는 존재와 생명을 긍정하는 신생의 시간으로 충만하다. 두 권의 시집(『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에서 확인되듯이, 그의 시는 일상적인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현재적 삶에 대한 애착보다는 그것으로부터의 초월에, 죽음보다는 삶의 에너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의 시는 도시적 감수성보다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서정적 상상력을 선호하는데, 그의 시에서 자연적 대상은 “작고 앙증한 줄기 끝에 여린 잎들이며 꽃을 매단/어린것들 날아오르려 퍼득거린다/솟아오르고 누르려는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숲」)처럼 꿈틀거리는 생명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형상과 인식의 교차지점에서 발화되는 시인의 언어가 지나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존재와 생명의 세계를 살펴보자.
저물면 누구나 그곳에 닿아야 한다지만
무덤이 여우처럼
머리 위를 쑥쑥 넘어가는 때가 있다
나주 반남면 복암고분군 앞
살구꽃잎 하르르
살구나무를 벗고 떨어질 때
일천오백년이 꽃잎 한 장의 두께로
내 가슴에 수로를 내며 헤엄쳐 들어오고
바람은 자꾸 잔디를 핥고 있는 햇살 알갱이
서둘러 떼어놓는다
(중략)
몇 남지 않은 늦가을 햇살에
잘 익은 콩깍지들 느닷없이 낡은 집 부수고 뛰쳐나오듯이
오래된 기억처럼
무덤은 오늘도 슬프게 시간을 넘는다
때론 여우처럼 때론 도체비처럼
- 「무덤은 시간을 넘는다」 부분
‘무덤’은 오래된 시간의 성소이고, 세상의 내부에 존재하는 세상 밖의 공간이다. 한 세계의 내부에 있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오롯하게 세상의 시계(時計)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무덤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죽음이 아니라 ‘일천오백년’이라는 역사의 시간으로 가늠될 수 있는 아득한 것일 때, 우리는 그 무덤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의 내부라고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사적(史跡)이란 그 오래된 시간에 붙여진, 그 이름을 통해서 현재적 삶과 분리된 시간이다. 시인은 지금 나주 반남면의 복암고분군 앞에서 일천오백년이라는 역사적 시간을 거슬러 가슴에 수로를 내며 헤엄쳐 들어오는 시간을 경험한다. 역사적인 시간이 실존의 매개를 거치면서 현재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이다. 무덤은 저마다 실존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무덤은 역사적인 시간의 이치를 따르지만, 그 무덤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한 개인의 고단했던 삶의 흔적들이다.
시인은 “콩코투리 같은 쌍무덤” 앞에서 무덤들이 햇살공방 안에서 다시 구워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커다란 독을 포갠 침대”란 고분에서 발굴된 옹관(甕棺)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은제관식(銀製冠飾)이며 금동신발”은 시신과 함께 출토된 사내의 부장품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오랜 잠에서 깨어난 무덤의 주인이 그것들을 벗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이 추측(“이젠 벗고 싶어할 것이다”)은 곧이어 “그도~다다르고 싶은 것이다”라는 확신적 진술로 바뀐다. 물론, 우리는 이 확신의 주체가 무덤 속의 사내가 아니라 시인 자신임을 알고 있다. ‘무덤은 시간을 넘는다’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시인은 오래된 무덤이 일천오백년의 시간을 되감으면서 현재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란 “잘 익은 콩깍지들 느닷없이 낡은 집 부수고 뛰쳐”나오는 것과 흡사했으리라. 시간을 넘는 것은 무덤만이 아니다. 한 인간의 실존이 새겨져 있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이나 낡음과 무관하게, 시간을 넘는다. 다만, 이 시간을 넘는 사건이 언제 어떻게 발생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앞서 우리는 그것이 인식과 형상의 교차점에서 시작된다고 말했지만, ‘여우’나 ‘도체비’가 그렇듯이, 그것은 비이성적인 시간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자본주의의 속물성이 우리 삶의 뿌리에까지 퍼져 있고, 이성, 실용, 합리성이 세계의 유일한 법칙처럼 통용되는 지금, 이런 시간을 믿는 것은 여전히 가능할까.
“그런 걸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라는 진술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들린다. 복암고분군의 무덤이 일천오백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가로질러 시인의 현재로 들어왔다면, 「지금도 어느 물기 머금은 눈이 나를 보고 계신다」에 등장하는 천이백년을 사는 개구리는 영원성의 상징처럼 보인다. 이 개구리의 정식 이름은 금와보살이다. 양산 통도사의 자장암엔 신라 자장율사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알려진 금개구리(金蛙) 전설이 전래되고 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축서산 통도사의 자장암 곁의 커다란 암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작은 개구리가 있다……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게 한 것이다”)에도 등장하는 그 개구리는 입과 눈가에 금줄이 선명하고 등에는 거북 무늬가 있다고 알려져 있고, 사람들은 이 개구리를 친견(親見)하는 것만으로도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는다.
물론, 이 전설, 특히 개구리가 이천 사백 년을 산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 역시 믿는 사람만큼이나 많다. 믿음은 과학의 검증대상이 아니기에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믿음은 언제나 믿음의 주체에게만 의미를 갖는다. 그런 까닭에 시인에게 이 개구리의 존재는, 성서에서 물고기의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살다가 땅으로 돌아온 요나(Jonah), 신라의 원효와 혜공이 법력을 시험하기 위해 물고기를 먹고 변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살아서 헤엄쳐갔다는 혜공의 물고기와 동등한 위상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 믿음이 시인에게는 ‘종교’의 이름이 아니라 ‘진리’의 이름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진리’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할 수 없는 것임을 개구리의 존재가 증명해보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아득한 고대의 시간이 여전히 유효하고, “물기 머금은 눈”으로 상징되는 모종의 초월적 시선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응시하고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믿음을 미신이라고 치부하면서 ‘근대’이라는 인간의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단 이 전설에 대한 믿음 때문은 아니지만, 세계를 인식하는 시인의 시선은 ‘근대’라는 문명의 강박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햇귀와 흙냄새로 술렁이는
하늘 아래 가장 설레는
어치와 떼까치와 아지랑이의 시간
대궁을 타고 터지는 저 구름 씨앗 소리 좀 보아
펼친 구름의 옆구리 사이에서
새 흉내를 내며 햇살이 소리치며 날아갈 때
저 불구의 나무도
불굴의 나무가 되어
누렇게 익어가는 상아 궁전의 봉오릴 타고
지상을 뜨고 싶단
맑고 뜨거운 생각 부풀리는 것을
그러나 꿈에도 생각 못했다는 듯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애써 낳은 구름 땅바닥에 엎질러버리곤
새끼를 잃은 어미소가 되어
허전을 간식처럼 되새김질하는
저 자글자글한 잔주름
- 「목련」 부분
구름을 낳는 나무, 일 년에 한 번 땅속에 묻어둔 구름을 허공에 매다는 나무, 그렇지만 어느 순간 애써 낳은 구름들을 모조리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새끼 잃은 어미소처럼 허전함을 되새김질하는 자글자글한 잔주름은 모두 ‘목련’의 형상들이다. 이 시는 분명 봄날 화려하게 만개했다가 불현듯 누렇게 퇴색한 잎을 떨구는 ‘목련’에 대한 시이지만, 우리가 이 시에서 감각하는 것은 ‘대상-나무로서의 목련’이 아니라 ‘생명-나무로서의 목련’이다. 손진은의 시에서 ‘자연’이 역동적인 ‘생명’의 이미지로 드러남은 앞서 밝힌 대로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그 역동적인 식물성의 세계를 “튼 살 틈으로 밀어내는 구름의 자식을/혀와 목젖 근처 심지어는 팔다리에까지”, “새끼를 잃은 어미소가 되어”처럼 동물성의 언어를 빌어 표현한다. 이는 생명의 시각에서 동물과 식물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시는 ‘목련’을 예찬하는 시는 아니다. 이 시에서 ‘목련’은 시인에 의해 선택된 하나의 시적 대상이지만, 또한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을 자신의 시스템으로 내장하고 있는 순환체계로서의 자연의 환칭이기도 하다. 때문에 「목련」에서 시인은 화려한 개화가 아니라 목련이 자글자글한 잔주름으로 변해가는 몰락의 과정에 주목한다. 생태주의적인 시편들과 달리 손진은의 시에서 ‘자연’은 찬양의 대상이 아니다. 가령, “구름을 낳는 나무”가 신생(新生)의 형상이라면, “누렇게 익어가는 상아 궁전의 봉오리”는 이미 완숙기에 접어든 성장/노쇠의 형상일 것이고, 맑고 뜨겁게 부풀던 꽃봉오리가 어느 날 땅바닥에 엎질러지는 것은 죽음의 형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유한과 안타까움의 상징이기보다는 모든 생명이 지니고 있는 양면성과 순환의 원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키 큰 서어나 느티 아래 발 담그면
그가 낳은
연두 초록 물고기떼가 훅,
뿜어대는 입김
새어드는 햇살 하늘 계류로 몸 씻고
겹치고 포개는 빛그늘 만드는
저 지느러미 옆줄들
챙챙 서늘한 눈알 주둥이 부딪다
게으른 구름과 새똥의 적막 찢어놓자는 심산으로
배 뒤집으며 하늘 수면위로 튀어오르기도 한다
설걸설겅 내 몸도 떠오르는 현기증
제법 초록물이 든 팔다리로 나
서둘러 마을로 내려간 뒤에도 저들
어스름 속살에 깃들어 쌔근쌔근 잘도 잘 것이다
쪽쪽 햇살 젖꼭지 빨고
촘촘 빗줄기 푸르고 노란 달과 별 꼬리를 물고
하늘 그물 찢으며 시간의 내 건너면
마침내 붉은 아가미 될 것이다
사방 햇빛에 불붙은 몸으로
한 토막 어린 것들의 빵으로
우우 몰려다닐 것이다
모천회귀,
세찬 바람과 격류 거슬러
기진한 숨 할딱이는
세상 모든 바닥의 어미가 되어
- 「물고기 나무」 전문
「 목련」이 ‘목련’이라는 식물의 세계를 동물의 언어로 표현했다면, 「물고기 나무」는 식물의 세계를 ‘물고기’라는 비유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은 키 큰 서어나무와 느티나무 군락이 연출하는 초록의 그늘을 “연두 초록 물고기떼”에 비유하고 있다. 흔히 남성의 도드라진 근육과 힘줄을 연상시키는 서어나무 그늘에서 시인은 지금 “지느러미 옆줄들”을 본다. 시각적 유사성에 의해 포착된 이 옆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장대하게 뻗어 있는 서어나무를 초록의 물고기 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시적 인식의 힘은 이처럼 ‘물고기’와 ‘나무’라는 이질적인 속성을 지닌 대상들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그것들 사이의 횡단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감각과 인식을 낳는다. 시적 인식이 여기에 이르자 이제 식물의 세계는 전면에서 물러나고 어류의 세계가 전면화된다.
서어나무와 느티나무 아래에서 초록의 물을 몸에 묻힌 시인은 마을로 내려간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이 인간의 세계로 되돌아간 다음에도 ‘저들’이 어스름 속살에 깃들어 잠을 잘 것이라고 추측한다. 일반적으로 사물을 주체의 내부로 옮겨오는 서정시의 작법에서 대상은 주체와의 연관성 안에서만 변이된다. 이러한 인식론에 따르면 인간의 시선이 대상에서 회수되는 동시에 대상은 인간의 시선이 닿기 이전의 물리적 세계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서어나무와 느티나무가 만들어낸 초록의 물이 인간 ‘나’의 존재와 상관없이 지속될 것임을 예상한다. 아니, 그 존재감은 “쪽쪽 햇살 젖꼭지를 빨고/촘촘 빗줄기 푸르고 노란 달과 별 꼬리를 물고/하늘 그물 찢으며 시간의 내 건너면”처럼 활발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자연’이 인간과 자연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에 의해 포착된 대상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 즉 신화, 설화, 전설 등을 배경으로 한 영(靈)의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의 강을 건너면 “연두 초록 물고기떼”가 “붉은 아가미”가 된다. ‘모천회귀’가 암시하듯이, 이것은 산란을 앞둔 연어의 색깔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초록의 물에서 시작된 식물성의 세계가 마침내 “세찬 바람과 격류 거슬러/기진한 숨 할딱이는/세상 모든 바닥의 어미가 되어”처럼 어류의 세계가 된 것이다. 이 ‘어미’에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어미’는 “연두 초록 물고기떼”에서 “붉은 아가미”에 이르는 자연의 시간적 순환과정을 상징한다. 이런 맥락에서 산란을 앞둔 연어의 붉은색 주둥이를 붉게 물든 가을 낙엽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그때 식물과 어류의 세계는 인간이 부여한 생물학적 질서를 뛰어넘어 시적으로 관계 맺는다. 둘째, 모천으로 회귀하여 산란하는 물고기를 “세상 모든 바닥의 어미”라고 표현한 대목에 주목하자. 시인은 모천으로 회귀하는 물고기떼에서 한 생명의 생물학적 모성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을 뜨겁게 끌어안는 모성으로서의 자연을 본다. 이것은 ‘자연’이 비단 인간의 삶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원천이자 마지막 안식처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그 모성으로서의 자연이 “세찬 바람과 격류”를 거슬러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손진은의 시에서 ‘자연’은 생명의 기원이자 종착지이고, 모든 바닥을 감싸는 따뜻한 힘이 된다.
손진은의 신작시들이 보여주는 신생에 대한 시적 관심은 때로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신화적인 시간을 펼쳐 보이며, 또 때로는 자연 안에서 모성의 따뜻한 힘을 긍정하기도 한다. 세속의 시간을 벗어난 곳에서 시작되는 동시대의 생태학적 상상력과 달리 그의 시편들은 대부분 ‘자연’에서 인간의 시간을 넘어서는 지점을 포착하려는 관심을 환기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시가 지닌 강점은 ‘자연’을 정태적인 정물의 세계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특유의 역동성을 부여받고, 모순적인 힘들이 길항하는 우주적인 세계로 그려진다. 이 우주의 시간 안에서 인간의 삶이 차지하는 비중을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이 우주의 시간을 믿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존재들을 가리켜 시인이라고 부른다.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