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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수와 꼼수

테오리아2 2014. 6. 29.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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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수와 꼼수

              강호형

 

둑 둘 줄 아십니까?

줄 모릅니다.

기는 두시오?

것도 못 두는데요.

그럼 고누는 두는가?

이건 바둑 두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이다. 바둑은 최첨단 컴퓨터로도 못 당할 만큼 수가 무궁무진하여 절대 강자가 없다. 장기는 바둑에 비해 수가 단조롭지만 글자를 알아야 둘 수가 있고, 고누란 작게는 네 칸, 커봐야 아홉 칸짜리 판을 땅바닥에 그려 놓고 말 대신 조약돌이나 나뭇가지, 풀줄기 등을 잘라 장기 흉내를 내는 놀이라 배우기가 쉽고 글자를 몰라도 둘 수가 있어 주로 하층민들이 즐겼다. 그러니 바둑을 도()로 여기던, 자칭 도인들의 눈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을 이 놀이를 그렇게 비하하면서 우월성을 과시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바둑 이외의 놀이는 모조리 잡기(雜技)로 얕잡아 본다. 그리하여 바둑을 수담(手談)으로 미화하는가 하면, 신선놀음으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따라서 바둑에는 어려운 용어도 많다. 우선 바둑판에는 화점, 천원, , 변 등 위치마다 이름이 있고, 실전에서도 빈삼각, 호구, 단수, , , 등 돌이 놓인 모양마다 이름이 있으며, 입계의완(入界宜緩)적진 깊숙이 들어가지 마라, 공피고아(攻彼顧我)상대방을 치려거든 나부터 살펴보라 등 손자병법을 방불케 하는 열 가지 계략을 열거한 위기십결(圍棋十訣), 조이구승자다패(燥而求勝者多敗)-조급하게 이기려하면 더 많이 진다, 부쟁이자보자다승(不爭而自保者多勝)-싸우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자가 더 많이 이기느니라 어쩌고 하며 마음을 다스리라는 위기십훈(圍棋十訓)이라는 것도 있다. 그래서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 하고, 기력이 9단에 이르면 입신(入神)했다고까지 한다. 10단이 없는 것은 9단도 모르는 수가 더 있기 때문이라니 귀신도 모르는 수가 있는 뜻이리라.

나는 그 고상하고 난해한 수사(修辭)에 주눅이 들어 배울 엄두도 못 내고 장기나 두면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나처럼 한 수 무르자고 사정을 하면 상대는 의례 일수불퇴(一手不退)를 외치며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쳐서 티격태격하는 부류와는 차원이 다른 줄로만 알았다.

내가 처음으로 바둑을 두어 볼 엄두를 낸 것은 군대에서였다. 상급자들 앞에서는 훈련된 가축에 불과한 졸병들도 바둑을 두던 것이다. 거기 끼어들어 간신히 두 집 짓는 법이나 터득할 무렵에 제대를 하게 됐다.

귀향해 보니, 군대를 면제받고 고향을 지키던 초등학교 동창 H군의 바둑 실력이 상당했다. 그는 농촌에 묻혀 있으면서도 한학에 능한 선비인지라 삼가 하교(下敎)를 청했더니 대뜸 아홉 점을 놓으라고 했다. 왕년에 학업 성적으로 자웅을 겨루던 라이벌 앞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나는 거기서 판을 거듭할수록 바둑의 그 고상하고 난해한 수사들이 헛구호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홉 점을 놓고도 번번이 참패였다. 욕심을 낼수록, 분을 참지 못해 복수의 칼을 갈수록 더 많이 졌다. 상대방의 수가 꼼수임에 틀림이 없어도 응징할 방법을 몰라 대마를 죽이고 참패만 거듭하는 심정이라니! 독사처럼 약이 올라,

, 너 그 꼼수 좀 두지 마!

하고 대들면,

허허 무엄하다, 스승은 하늘이거늘 그 무슨 망발인고. 그게 묘수지 어째 꼼수란 말인가!

이렇게 거드름을 핀다. 이런 수모를 당한 날은 잠도 오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망막에는 바둑알들만 우글거렸다. 50여 년 전의 일이다.

요즘도 한 달에 한두 번씩 그 친구와 바둑을 두는데 형편이 달라졌다. 기력이 많이 늘기도 했지만 스승님의 권위가 형편없이 추락한 것이다. 아마 2단 정도로 실력이 대등할 뿐 아니라 승률이 오히려 내 쪽으로 기울게까지 되었으니. 그래도 스승은 스승인지라 모임에서 만났다가 헤어질 때는 슬그머니 다가와,

어때, 오늘 한 수 가르쳐 줄까?

한다. 아마추어 바둑에서는 상수(上手)가 백을 잡는 것이 관례인데 아직은 내가 백을 차지하고 있는지라 나는 또 가소롭다는 듯이,

흑 들고 가르치는 스승님도 있나?

하며 비아냥거리지만 이런 날은 백을 넘겨주기 십상이다. 티격태격, 옥신각신하다가 세 판을 내리 져서 백을 빼앗기고는,

술이 취해서.

하고 핑계를 댄다. 모임에 나온 열 명 중에서도 술을 제일 많이 마신 나와는 달리 그는 술을 아예 못하는 체질이라 한 잔도 안 마셨으니 터무니없는 핑계는 아닌 셈이다. 하지만, 미구(未久)에 내가 백을 탈환하면 그에게도 핑계가 있다.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

그는 나이 70에도 방송통신대학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니 이 또한 근거 없는 핑계는 아닐 터이다.

최근에는 바둑을 도가 아니라 스포츠로 규정하고, 지난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는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여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휩쓸었다. 스포츠에서는 심리전도 전술이다. 하여, 요즘 H와 나는 바둑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인사를 나눈다.

내가 먼저,

우리 스승님이 어제 밤에는 잠을 좀 주무셨나?

하고 심기를 건드리면,

오늘은 술 핑계 대지 말고 잘 배워!

한다.

요즘은 워낙 속이면 묘수, 속으면 꼼수가 되는 풍조가 만연한 세상이라 바둑을 둘 때마다 세상일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