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호 시
연못의 독서
길상호
그날도 날아든 낙엽을 펼쳐들고
연못은 독서에 빠져 있었다
잎맥 사이 남은 색색의 말들을 녹여
깨끗이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초겨울 가장 서둘러야 할 작업이라는 듯
한시도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았다
침묵만 남아 무거워진 낙엽을
한 장씩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서
물살은 중얼중얼 페이지를 넘겼다
물속에는 이미 검은 표지로 덮어놓은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연못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래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어도
이야기의 맥락은 짚어낼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그림자를 뜯어
수면 아래 가만 내려놓고서
비밀처럼 깊어진 연못을 빠져나왔다
그날 읽을 것도 없는 나를 넘기다 말다
바람이 조금 더 사나워졌다
기타 고양이
길상호
길 잃은 아기 고양이는
기타 속에 들어가 몸을 눕혔다
끊어진 바람을 묶어 새벽이
다시 골목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현악기 속의 관악기가 야아옹
울음 밖의 음악이 야아옹
울림통이 깨진 기타와
눈만 살아서 두려운 고양이가 만나
서로의 악보 속 사라진 음표를
다시 그려 넣는 것인데,
늘어진 탯줄과 기타 줄을 엮어
이어가는 연주를 듣다가
음계를 잃어버린 골목의 계단도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2016 오늘의 좋은시 』푸른사상 2016
기타 고양이
길상호
길 잃은 아기 고양이는
기타 속에 들어가 몸을 눕혔다
끊어진 바람을 묶어 새벽이
다시 골목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현악기 속의 관악기가 야아옹
울음 밖의 음악이 야아옹
울림통이 깨진 기타와
눈만 살아서 두려운 고양이가 만나
서로의 악보 속 사라진 음표를
다시 그려 넣는 것인데,
늘어진 탯줄과 기타 줄을 엮어
이어가는 연주를 듣다가
음계를 잃어버린 골목의 계단도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2016 오늘의 좋은시 』푸른사상 2016
울화 / 길상호
부르르 몸이 떨려올 때 있어요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뼛속에 심은 기억이 깨어나
꽃 피우는 순간이래요
무슨 꽃이 이렇게
가슴 뻐근한 게 있냐고
되묻는 나를 쓰다듬으며
꽃은 원래 울먹이며 피는 거래요
낮술을 퍼먹다 나와
밭고랑에 퍼질러 앉은 내게
네게도 한 무더기 피려나 보다
봄볕처럼 따뜻하게 웃어요
그 말에 더 답답해져 얼굴 돌리면
팔랑팔랑 또 날아와서는
순을 자꾸 꺾으면 가슴이 썩는다고
꽃 피어나려 대궁을 흔들면
조용히 숨길 열어주래요
화병으로 돌아가시더니
어찌 그리 유해졌는지
부드럽게 바람을 타다가
말도 없이 유유히 멀어지네요
할머니가 쉬었다 가는 자리마다
자그마한 꽃들이 피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