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시 방

[스크랩] Re: 소규모 인생계획 -이장욱

테오리아2 2015. 12. 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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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규모 인생계획

​                               이장욱​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선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어제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싸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이스트를 가득 넣은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올랐다.

 

질문, "소규모 인생계획"이란 뭘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계획 앞에 좀체로 '소규모' 등의 낱말을 붙이지는 않는다. '간신히' 팔짱을 낀다고도 아기들이 '부드럽게' 태어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만이 쓰는 버릇인 셈이다. 그래서 단지 이것 때문에 위 시가 좀 새롭다거나 달라져 보인다면 그 또한 문제다. 시인들은 저마다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식의 언어전략을 예비하는 자들이므로 '이장욱 식'이라 해두자. 

낯선 두 장소, 또는 낯선 두 행위가 한 문장으로 재조립되는 그의 문장은 풍성한 이미지를 갖는다. 왜 이런 시도들이 풍성한 이미지로 이어지는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두 장소나 행동(이상한 표현이다)은 흔히 두 문장으로 수렴되거나 한 문장 안에 놓일 경우 접속사 등으로 병렬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크기가 유사한 이질적 행위를 동행시킴으로써 인접된 이미지그룹을 연상이 아닌 방법을 통해 이어놓는다. 이 지점은 당연히 두 행위(혹은 장소)에서 유발된 이미지들 때문에 이질적이면서도 곱절의 새로운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제안, 아래처럼 시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으로 시적 분위기를 점쳐보자.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중략....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이스트를 가득 넣은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올랐다.

 

소규모 인생계획의 요체는 간소하게 사는 것이다. 간소함이 자연친화적인 것이든 사회적 활동반경을 축소하는 것이든 '간소하게 살기로 했다'라고만 하면 끝날 일인데..... 그렇다면 그렇게 말할 때조차 시적일까? 대부분의 습작기간 중에 판별하기 힘든 한 가지는 어떤 경우의 문장들을 '시'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문장만 늘어놓으면 시가 될까? 그걸 지은이가 시라 부른다면 시가 맞다. 문제는 누구나 공히 시로 취급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끄덕이게 만드는 일이다. 자, 여기 이 자리에 '간소한 생을 살기로 했더니 도시가 부풀어올랐다'라는 내용을 가진 시가 있다. 이스트를 잔뜩 넣은 빵처럼' 부풀어오른 도시'는 입맛이 도는 날들이자 공간이 될 것이다. 이쯤에서 생략한 중간부분을 살펴 보기로 하자. 어디쯤엔가 소규모 인생계획 밖에서 아웅다웅, 혹은 티격태격하는 이들의 번잡한 삶이 펼쳐질 것이다. 오호라, '나'라는 인칭이 없으니 이렇듯 진폭이 넓어지는구나. 이런 것이야말로 틀림없는 마술이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청개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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